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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몹]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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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토토닷작성일 2024-04-08 22:56 조회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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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서 발생해 무고한 사람들의 수많은 죽음과 사상을 초래하는 재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새로운 재난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재난은 너무나 애처롭다.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
이 글은 축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재난을 특별한 순위 없이 나열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1. 안드레스 에스코바르의 죽음
안드레스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의 축구선수였고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BSC 영 보이즈, 콜롬비아 국가대표팀에서 수비수로 활약했다.
그냥 축구였을 뿐인데, 1994년 7월 나이트클럽 주차장에서 콜롬비아 축구 주장 에스코바르를 사살한 살인범은 결코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에스코바르는 1994 FIFA 월드컵의 여파로 살해당했는데, 이는 팀의 대회 탈락에 기여한 자책골에 대한 보복으로 알려졌다. 그의 죽음은 국가의 이미지를 국제적으로 실추시켰다.
에스코바르 자신은 콜롬비아의 더 긍정적인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 자국에서 찬사를 받았다. 그의 사망 발표는 단연코 축구 역사상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이다.
2. 뮌헨 항공 참사
축구에서 충격적인 다른 순간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을 태운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미끄러진 뒤 추락한 사건이다. 이는 구단 역사상 가장 어두운 기억 중 하나로 남겨졌다.
버스비의 아이들로 알려진 이 팀은 15명의 다른 탑승자들과 함께 사망하면서 항공 사고로 8명의 선수를 잃었다.
뮌헨 항공 참사는 1958년 2월 6일 서독 뮌헨-림 공항의 진창눈으로 덮인 활주로에서 세 번째 이륙을 시도하던 영국 유럽항공 609편이 추락하면서 발생했다. 비행기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팀과 서포터, 언론인들이 타고 있었다.
항공기에 타고 있던 44명 중 20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부상자들과 일부 의식을 잃은 사람들은 뮌헨의 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3명이 추가로 사망했고, 통틀어 21명의 생존자와 함께 2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6년 된 에어스피드 앰배서더 2는 연료를 보충하기 위해 잠시 경유지인 뮌헨에 착륙한 것으로 알려졌다.
항공기에 연료를 주입한 후 승무원들은 엔진 문제로 두 번이나 이륙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했고 비행이 다음 날로 지연될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일정을 준수하기 위해 승무원들은 세 번째 이륙을 시도했다.
눈으로 인해 활주로는 두꺼운 슬러시로 덮여 있었고, 이로 인해 비행기의 속도가 너무 느려져서 이륙할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항공기는 활주로 끝에서 미끄러져 공항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를 뚫고 인근 가옥에 충돌했다.
이로 인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 7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8번째로 던컨 에드워즈가 15일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3. 마르크-비비앙 푀의 죽음
마르크 비비앙 푀는 카메룬의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구단과 국가대표팀에서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카메룬의 뛰어난 미드필더 푀가 2003년 카메룬과 콜롬비아의 컨페더레이션스컵 준결승전에서 전반 73분에 쓰러져 숨졌다. 이 사건은 축구 경기장에서 본 가장 큰 비극들 중 하나였다.
이는 전 세계에 텔레비전으로 방송돼 축구계를 경악케 했다. 외관으로 신체적인 문제는 없는 듯 보였지만, 나중에 부검 결과 푀는 이전에 진단받지 않았던 심장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폐 소생술을 시도한 후 푀는 들것에 실려 나갔고 필드 밖에서 인공호흡과 산소 공급을 계속해서 받았다.
의료진은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45분을 보냈고, 그는 프랑스 리옹 쪽의 한 의료 센터로 이송된 후에도 아직 살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푀는 카메룬 수도 야운데에 있는 소년 소녀들을 위한 축구 아카데미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4. 레스터 시티 헬기 추락 사고
2018년 10월 27일, 영국 레스터에 위치한 레스터 시티 풋볼 클럽의 홈구장인 킹 파워 스타디움에서 아구스타 웨스트랜드 AW169 헬기가 이륙 직후 추락했다.
구단 소유주 비차이 스리바다나프라바를 포함한 승객 4명과 조종사, 총 모든 탑승자 5명이 모두 숨졌다.
항공사고조사국은 추락 원인이 편향 제어 장치의 상실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핀이 분리되어 헬리콥터가 불안정해지고 조종사가 제어할 수 없게 된 것을 발견했다.
5. 안토니오 푸에르타의 죽음
안토니오 호세 푸에르타 페레스는 세비야에서 뛰었던 스페인의 축구선수였다.
이 스페인 국가대표는 헤타페와의 라 리가 경기에서 뛰던 중 쓰러졌고, 사흘 뒤 장기간의 심장마비로 인한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숨졌다. 세비야의 UEFA 컵 우승을 도운 지 3개월 만이었다.
세르히오 라모스는 푸에르타에게 헌정하는 문신을 새겼고, 스페인이 2010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 그를 추모하는 티셔츠를 입었다.
라모스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안토니오는 항상 나와 함께 했다. 경기에서는 그의 셔츠를 입고 경기장에 나갔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그를 추모하는 셔츠를 입었다."
6. 필 오도넬의 죽음
마더웰의 주장은 2007년 12월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던디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5-3 승리를 거둔 경기가 끝나갈 무렵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35세였던 이 미드필더는 교체 직전 쓰러져 경기장에서 약 5분간 치료를 받은 뒤 대기 중인 구급차로 옮겨졌다.
오도넬은 스코틀랜드, 셀틱, 셰필드 웬즈데이에서 선수 생활을 보냈고, 그의 죽음은 스코틀랜드 축구계에 광범위한 슬픔을 안겨주었고 많은 경기가 연기되었다.
"그는 태도, 전문성, 진실성, 성실함 등 모든 면에서 사내들 중의 남자였다,"라고 그의 감독이었던 마크 맥기가 말했다.
오도넬은 경기 막판 마크 피츠패트릭과 교체를 앞두고 있었지만 교체가 이뤄지기도 전에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그의 팀 동료들과 조카 데이비드 클락슨을 포함한 경기장의 선수들은 이 사건에 거대한 충격을 받았고 오도넬은 들것에 실려 경기장 밖에서 대기 중인 구급차로 옮겨져 병원에 이송되었다.
빌 디키 머더웰 회장은 홈경기가 끝난 후 언론에 오도넬의 죽음을 알렸다.
이안 스틸리 구단 최고경영자는 말했다, "경영진, 감독, 선수, 팬들 모두 지난 몇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 단계에서는, 필 오도넬의 비극적인 죽음을 둘러싼 모든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는 즉시 대기 중인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필 발작을 겪었고 17:18에 사망선고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7. 헤이젤 스타디움 참사
1985년 5월 29일, 헤이젤 경기장 참사는 유벤투스와 리버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 날에 일어났다.
멋진 경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곧 악몽으로 바뀌었다. 경기 시작 전부터 경기장은 엉망이었다.
경기장 벽은 너무 약했다. 게다가, 열약한 체계 구조와 팬들 사이에 쇠사슬 울타리만 쳐놓고 팬들을 분리시켰던 것은 서포터들 간의 폭동과 싸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리버풀 팬들이 유벤투스 서포터들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인들은 리버풀 팬들은 물론 날아다니는 바위들을 피하기 위해 벽을 넘어 이동하려고 했고, 그 후 재앙이 닥쳤다.
취약한 경기장 벽이 유벤투스 팬들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져 39명이 숨지고 600여 명이 다쳤다.
리버풀 팬들의 무모함으로 인해 모든 잉글랜드 구단들은 5년간 유럽대항전 출전을 금지 처분을 받았고, 리버풀은 6년간 출전 금지 징계를 받았다. 게다가, 리버풀 팬 14명은 과실치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8. 힐스버러 참사
힐스버러 참사는 1989년 4월 15일 셰필드의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열린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에서 일어났다.
이 재난은 인구 과잉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거의 100명이 사망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이 재앙은 향후 20년 간 리버풀에게 암흑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FA 컵 준결승전은 중립적인 장소에서 치르기로 했고, 리버풀과 노팅엄이 맞붙을 경기장은 힐스버러 스타디움으로 정해졌다.
가장 큰 이유는 낡은 경기장 때문이었다. 이 참사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경기장에 들어가려고 하면서 시작되었다.
문제 상황을 더욱 앞당긴 것은 열린 출구 게이트였다. 이로 인해 팬들이 경기장으로 쉽게 유입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당 출구를 경계할 경찰관이 배정되지 않았고, 이미 꽉 찼던 경기장은 초만원이 되었다.
그 무게로 인해, 리버풀 서포터들에게 배치된 2개의 스탠딩 전용 중앙 펜스가 넘어지면서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짓밟았다. 이 참사로 96명이 사망하고 766명이 부상당했다.
당국은 지침을 따르기를 거부한 리버풀 팬들의 잘못이라고 보고했다.
리버풀 팬들이 죽은 사람을 소매치기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비난이 컸지만, 힐스버러 참사에 대한 2014년 이후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반증 되었으며, 참사로 이어진 것은 경찰의 통제 부족과 부실한 조직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9. 브래드포드 시티 스타디움 화재
브래드포드 시티 경기장 화재는 1985년 5월 11일 밸리 퍼레이드 그라운드에서 열린 브래드포드 시티와 링컨 시티의 잉글랜드 리그 3부 리그 경기 중에 발생했다.
경기장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메인스탠드였는데, 노후화된 것부터 해서, 나무 지붕, 관중석에 구멍까지 문제가 많았는데, 관중석 아래로 소지품들이 쉽게 빠져 물건들이 간단하게 쌓일 수 있었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문제점이 지적됐지만 이를 고치기 위한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좌석 아래에 쓰레기가 가득 쌓여 있는 상황에서, 간단한 스파크만으로도 쉽게 모든 것을 불붙일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5월 11일에 일어난 일이다.
브래드포드와 링컨 시티의 경기는 예상대로 시작되었고 관중석에서 연기가 나는 것이 목격된 하프타임까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큰 위험이 없어 보였지만 바람이 촉진제 역할을 하면서 불과 몇 분 만에 불길이 스탠드 전체를 집어삼켰고, 일부 사람들은 자리에 갇혔고 일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잠긴 문들과 닫힌 탈출로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결국 50명 이상이 불에 타 죽게 되었다. 연기가 난 지 7분 만에 도착한 소방대조차도 늦었을 정도로 너무 빨리 불이 퍼져나갔다.
이날 총 56명이 숨지고 265명이 다쳤다. 34년이 지난 지금도 브래드포드 시티 경기장 화재는 영국 축구 최대 화재 참사로 남아 있다.
10.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참사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참사는 축구 역사상 최악이자 가장 슬픈 재난으로 알려져 있다. 1964년 5월 24일, 페루가 리마에 위치한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축구대회 예선전을 위해 아르헨티나를 불러들였을 때의 일이다.
순위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다음 경기이자 마지막 경기에서 브라질과 맞붙을 예정이었던 페루에겐 승리를 위한 중대한 경기였다.
경기의 중요성 때문에, 50,000명이 넘는 팬들이 각자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것을 보기 위해 경기장에 참석했다. 경기장은 마지막 자리까지 가득 찼고, 이 자체만으로도 재앙의 조짐이지만,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참사의 원인은 폭동을 일으킨 사람이라는 것이 틀림없다.
단 6분을 남기고 아르헨티나가 한 골을 앞선 상황에서 페루가 동점골을 넣었는데, 우루과이 심판 앙헬 에두아르도 파조스가 득점을 불허했다.
페루 팬 중 한 명이 경기장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내 경찰에 붙잡혀 잔인하게 구타당했다. 이것은 이미 화가 몹시 난 페루인들에게 더 많은 기름을 부었을 뿐이었다. 이로 인해 폭동이 발생했고, 경찰은 최루탄으로 대응했다.
팬들은 탈출하기 위해 게이트로 달려갔지만, 경기장에는 게이트가 아니라 견고한 강철 셔터가 있었고, 여느 경기 때처럼 닫혀 있었다. 그러나 공황과 패닉에 빠진 팬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달려가면서, 맨 앞에 있는 팬들을 계단 아래로 밀어내 버렸다.
모든 압력으로 인해 끝내 셔터가 열렸고, 그러면서 다른 팬들의 무게에 짓눌려 죽은 서포터들이 드러나 보였다. 공식적으로 대부분은 내출혈과 질식으로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는 328명, 부상자는 500명으로 추정된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들 중 하나.
11. 포트사이드 스타디움 폭동
2012년 2월 1일, 이집트 프리미어리그 축구 경기 중 포트 사이드 경기장에서 알 아흘리와 알 마스리의 경기가 열렸다.
알 마스리 팬들이 경기장을 난입 후 떠나기를 거부해 경기가 30분간 지연되면서 모든 사건은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전개되었다.
경기 도중과 하프타임에도 알 마스리 팬들은 팀이 득점할 때마다 경기장을 급습했고, 이로 인해 이미 킥오프가 30분간 지연된 경기는 더욱 지연될 뿐이었다.
마지막 휘슬이 울린 후에야 알 마스리 팬들은 마침내 폭동을 일으켰다. 돌, 칼, 폭죽, 병 등으로 무장한 이들은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라커룸으로 도망친 알 아흘리 선수들을 공격했다.
선수들이 도망친 후, 알 마스리 팬들은 포트 사이드 스타디움에서 알 아흘리 서포터들을 공격했다. 12:1로 수적 열세에 놓인 알 아흘리 팬들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닫힌 문 때문에 도망치지 못했다.
이 폭동은 72명의 알 아흘리 팬들, 경찰관 한 명, 그리고 1명의 알 마스리 팬의 사망과 500명 이상의 부상으로 끝이 났다. 폭동으로 인해 최소 470명의 알 마스리 팬들이 체포되었고 73명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현재 21세기 최대의 축구 재해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최악으로 남을 것이다.
12. 루즈니키 참사
1982년 유럽 축구 경기 도중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66명의 팬들이 압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후속 조사에 의하면 최대 350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당시 소련 정부는 이 사건을 은폐했다.
나쁜 구조, 열악한 인프라, 서포터/팬들로부터의 행동까지, 무엇이 다음 재앙을 초래할지 우리는 결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보안이 향상되고, 경기장이 더욱 잘 설계되고, 중요한 경기에 대한 보다 세심한 준비가 이루어지면서, 스포츠 경기의 재난이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바라건대 최소한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우리는 무탈하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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